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에 대한 소견

광화문 이순신상을 부수고 새로 만들지 못해서 안달이 난 사람들이 있는가 보다.
칼을 오른손에 들었다, 일본도 같다, 갑옷이 중국풍이다, 얼굴이 조선 사람 같지 않다, 감히 예전의 세종대왕보다 크게 만들고 높이 세웠다 등등. 옳고 그르고를 떠나 논란 자체가 저학년 수준이라 그에 대해 왈가왈부하기조차 민망할 따름이다.

그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재제작이나 철거를 면해 무사히 수리를 마쳐 제자리를 지키게 되어 다행스럽다. 고증상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40년을 묵묵히 지켜온 역사성과 함께 시민들의 그동안의 사랑에 더 가치를 두어 그렇게 결정했다고 한다. 올바른 결정이다. 그럼에도 계속 불거지는 논란에 대해 짚고 넘어갔으면 한다.

아직도 큰 것이 제일인가?

언제까지 소국 콤플렉스에 매여 살 것인가? 광화문 앞의 예전의 단정한 세종대왕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쫓겨나고 황금을 바른 거대한 임금님이 불뚝 배를 내밀고 떡하니 앉아 있다. 아무래도 이전의 세종대왕상이 이순신 장군상보다 크기에서 작았었다는 것 외에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니까 큰 만큼 위대하다? 계급이 높을수록 커야 한다? 아파트 평수로 인생을 비교하는 습성이 세종대왕과 이순신의 크기와 가격을 비교하는 천박한 문화적 콤플렉스로 나타난 대표적인 사례로 여겨진다. 욕심과 과장은 한국 문화를 저급하게 만드는 아킬레스건이 된 지 오래다. 곳마다 주변을 아랑곳하지 않는 생뚱맞은 건물과 조각품들이 유치하고 속물적인 근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순신 장군상이 광화문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것은 자연스럽고 광장의 분위기에 어색하지 않다. 허나 세종대왕상은 예전 것부터 왠지 모르게 어색했다. 고증이나 작품성의 문제가 아니라, 발상 자체가 무리했다는 말이다. 임금의 얼굴은 함부로 그리지도, 백성들에게 보이지도 않던 전통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궁궐 밖 길가에 내다 앉힌 것부터가 억지스럽다는 말이다.

예전 것이든, 새로 만든 것이든 임금님을 정히 모시려면 길가가 아니라 실내였어야 했다. 물론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니지만 이왕이면 다른 나라처럼 세종대왕상도 어느 기념관 1층 로비에 앉혀야 어울릴 모양새라는 말이다. 이순신 장군상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추우나 더우나 그 자리를 꿋꿋이 지키는 것이 맞다. 오히려 비나 눈을 맞으면 더 장엄해 보인다. 허나 어전에 앉아 있는 모습 그대로 대로에 나앉아 눈비 맞으며 매연과 소음 속에 책을 펼쳐들고 공부하는 모습이라니! 이왕 밖에다 상을 세우려면 아무리 임금이라 해도 서 있는 모습이 더 자연스럽다는 말이다.

게다가 새로 만든 세종대왕상은 이전 것에 비해 돈을 너무 많이 발랐다. 그에 비해 예술성은 예전 것보다 못한 것 같다. 고증을 이유로 비만인데다 금칠까지 하는 바람에 마치 거대한 불상을 보는 듯하다. 골기(骨氣)는 쏙 다 빠지고 육기(肉氣)만 터질 듯 흘러넘친다. 책을 펼쳤다고는 하지만 문기(文氣)가 도무지 느껴지지 않는다. 안정감 있게 보이려고 한 사다리꼴 좌대의 비스듬한 경사는 오히려 보는 이로 하여금 시각적 불안을 느끼게 하고 있다.

그리고 세종로라 이름하여 세종대왕상을 반드시 만들어 놓아야 한다는 발상도 유치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면 지금 짓고 있는 행정도시는 골목마다 집집마다 세종대왕상을 만들어 놓을 셈인가?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왕 만든 것이니 지금의 광화문 황금세종상은 세종시가 완공되면 시청 로비로 옮겼으면 좋겠다. 그도 아니면 어디 대공원이나 교육청 청사 로비가 적당할 것 같다.

아무튼 돈이 넘치는 것이 문제다. 멀쩡한 보도블록 하루아침에 뒤집어엎고 새로 까는 도시 행정. 멀쩡한 산 중턱에 들어선 모텔. 시골 길가 산에 호화롭게 화강암으로 재단장한 학생부군들의 떼무덤들. 시골 동네 뒷산 중턱에 생뚱맞게 들어선 서양풍 전원주택. 달동네나 시골 한적한 동네 한가운데 불쑥 들어선 중세 유럽의 성채 같은 예배당. 주변하곤 전혀 안 어울리게 생뚱맞은 쓰나미를 영상케 하는 서울시 신청사. 재정이야 바닥나든 말든 지자체들의 초호화 신청사.

소박하고 절제된 우리의 전통문화는 어디로 가고, 난삽하고 조잡한 일회성 인스턴트 겉포장문화가 기승을 부린다. 황금색 플라스틱 돼지저금통을 연상케 하는 새 세종대왕상 앞에서는 도무지 숙연해지지가 않는다. 차라리 예전의 작지만 골기 찬 세종대왕상을 궁중박물관 로비에서나마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나친 순결주의를 경계한다

이순신 장군이 칼을 오른쪽에 쥐었으니 패장이라는 주장에는 그저 웃음밖에 안 나온다. 오른손이든 왼손이든 자기 편한 대로 쥐면 되는 것이지, 칼은 반드시 왼손으로 쥐어야 한다는 법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다. 아, 물론 그분이 왼손잡이가 아니라면 대적시에는 습관적으로 왼손으로 칼집을 잡고 오른손으로 칼을 뽑았을 것이다. 하지만 왼손으로 칼을 뽑아 칼집은 던지고 두 손으로 칼만 들고 싸울 수도 있는 것이다. 그나저나 진의 후방에 위치해서 지휘해야 할 장군이 직접 싸우기 위해 칼을 뽑는 일은 거의 없다. 그 정도면 이미 진 전투니까. 그렇다고 중간급 장수도 아닌 대장군이 칼을 뽑아들고 전투를 독려하는 모양새도 상투적이고 유치하다.

그런 논의는 차치하고서라도 왜 작가는 칼을 오른손에 쥐게 했을까? 바로 이점 때문에 나는 오히려 그 작가가 남다르게 대단한 예술적 감각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그분인들 왼손에 칼집을 쥐는 것이 일상적이라는 것을 몰랐을 리 없었다고 본다. 전 세계 대부분의 무인상들은 왼손에 뽑지 않은 칼이나 활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뽑은 칼이라면 당연히 오른손에 위치시켰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뽑지도 않은 칼을 오른손에 쥐게 한 것은 보는 이의 심리적 효과를 고려한 작가의 의도라고 여겨진다.

자, 그렇다면 일부의 주장대로 지금 이순신상의 칼을 왼손에 쥐어 보자. 쉽게 상상이 가지 않으면 이순신상 사진을 컴퓨터에서 좌우반전을 시켜놓고 바라보라. 아니면 오른손에 지팡이나 우산을 들고 직접 거울 앞에 서보라. 그리해보면 작가의 의도를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반전된 사진은 뭔가 모르게 바라보는 이에게 거부감을 안긴다. 왜 그럴까? 이는 바라보는 우리가 대부분 오른손잡이이기 때문이다. 설사 왼손잡이라 하더라도 오른손 문화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상대는 왼손에, 나는 오른손에 칼을 들고 마주 보는 데칼코마니적인 편대칭은 움쩍달싹도 못하게 거북스럽다. 허나 상대가 오른손에, 나도 오른손에 칼을 쥐고 마주보는 태극적 대칭에는 움직임의 여유와 역동성이 절로 살아난다. 해서 후자적 구도가 자연스런 흡인력을 갖는 것이다. 비록 동상을 마주하는 우리가 오른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해도 은연중 그런 느낌을 받게 된다.

칼이건 등채건 지팡이건, 뽑았건 그냥 쥐고 있건, 우리 대부분의 오른손잡이들은 상대가 무엇이든 오른쪽에 들고 있어야 안정감을 느낀다. 서로 겨루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야구에서 우완타자가 좌완투수를 만나면 껄끄럽다. 좌완투수와 좌완타자가 만나면 더욱 껄끄럽다. 왼손잡이와 마주보고 식사할 때처럼, 혹은 오른손 권투선수가 왼손잡이를 만났을 때 거북스러운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서로 익숙치 않은 탓이다.

이런 심리적 역학적 구도를 염두에 두고 칼을 오른손에 위치시킴으로써 칼을 뽑지 않고도 뽑은 듯한 역동성과 위엄을 동시에 살려낸 것이다. 광화문 이순신상이 상당히 위압적임에도 불구하고 여타 이순신상이나 다른 장군상들보다 더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아마도 작가는 이 부분에서 상당한 고심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난 이점에서 이 작가의 위대성을 보았다. 정중동(靜中動)의 미학을 완벽하게 구현해낸 세계 최고의 작품이다.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보아야

그 다음, 칼이 일본도 같다는 지적도 어느 정도 설득력은 있지만 이 또한 지나친 감이 있다. 그러면 어떤 것이 한국검의 전형인가? 전형이 있기나 한가? 대한민국 박물관에 소장된 그 어떤 무기도 똑같은 건 없다. 만드는 사람마다 다 달랐다는 말이다. 십팔기 중 ´제독검´에서 보듯 오히려 임란 때까지 직도를 많이 사용했다. 그리고 그 장식도 각자 취향대로 달랐다. 물론 일반 졸병들은 그저 주는 대로 받아 스스로 날을 세우고 손잡이 등 장식을 자기에게 편하게 붙이고 감아 사용하였다. 계급이 올라갈수록 형편이 나아져 보다 호화로운 무기들을 가질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한중일 무기들은 서로 비슷한 점도 많다.

갑옷이 중국풍이라는 주장 역시 일리 있는 말이기는 하다. 그렇다고 완전히 중국 갑옷이라 단정하기도 곤란하다. 이 역시 칼처럼 너무 그렇게 따질 일은 아닌 듯싶다. 아마도 작가는 당시 여러 가지 자료들을 보고 작품을 구상했을 것이다. 비록 40년 전이라 해도 박물관에 있는 갑옷 자료들도 참고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전통을 고집하지 않은 것은 그분의 예술적 심미안에서 그런 모양을 만들어냈다고 본다.

거북선 모형도 논란의 대상이다. 그렇지만 다른 무기들과 마찬가지로 거북선의 표준 원형을 찾는다고 하는 것 자체부터가 무리이다. 임진왜란 난리통에 지금처럼 설계도 보면서 공장에서 찍어내듯 거북선 만들었겠나? 큰 배는 큰대로 작은 배는 작은 대로, 좁은 배는 좁은 대로 넓적한 배는 넓적한 대로 거북선을 만들었을 것이니, 당시 모든 거북선이 똑같은 모양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면 너무 시야가 좁다고 하겠다.

이순신 동상 얼굴이 조각가를 닮았다고? 당연한 일이다. 거의 모든 화가나 조각가들은 남의 얼굴을 그리거나 빗는다고 하지만, 결국 자신이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닮게 되어 있다. 그래서 모나리자뿐 아니라 다빈치가 그린 모든 인물상은 어딘지 모르게 다빈치 자신을 닮는 것이다. 거울이 생긴 이후 사람들은 남을 그리면서도 절로 자신을 투사하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따라서 그런 트집은 무리이며 예술가에 대한 모독에 지나지 않는다.

광화문 이순신 동상은 작가의 예술적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를 두고 진품명품 감정하듯 자꾸 고증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몰상식한 짓이다. 따지고 들자면 갑옷을 벗겨 속옷까지 들여다봐도 성에 다 차지 않는다. 그때는 그런 점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던 것뿐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걸 없던 것으로 하자는 건 역사에 대한 지나친 오만이자 편협한 맹신이다. 고증에 다소 무리한 점이 있더라도 예술성과 작품의 품격을 음미하면서 그 가치를 논해야 할 것이다.

동양의 회화나 글씨를 논할 때는 기신론(氣神論)과 풍골론(風骨論)을 빼놓곤 논할 수가 없다. 비록 서양식 조각이라 하나, 광화문의 이순신상은 기(氣), 신(神), 풍(風), 골(骨)의 기운이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골고루 잘 드러내었다. 특히 풍골(風骨)은 국내 어느 작품도 흉내 내지 못할 만큼 뛰어나다. 장엄하고, 꿋꿋하고, 흔들림 없는 무장의 의지와 기품을 더없이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다. 새로 만든 세종대왕상과 비교해 보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여러 곳에 이순신상을 비롯해 수많은 동상들이 세워져 있다. 옛 위인은 물론 현대의 훌륭한 군인들의 동상도 즐비하다. 필자가 예술비평가는 아니지만, 사실 그 많은 동상들 중 광화문 이순신상이 가장 으뜸이라 생각한다. 아직 그보다 잘 만들어진 동상을 필자는 본 적이 없다. 그 앞에 서면 절로 숙연해지고 비장해지고, 장군이 언제든 명령만 내리면 누구라도 목숨 내걸 수 있을 만큼 믿음직스럽다.

사라진 이순신과 거북선, 내다버린 무혼(武魂)

이번 이순신 동상을 새로 만들자고 고집하는 분들께 묻고 싶다. 절간 대웅전에 모신 부처님은 도대체 누구를 닮았는지? 요즘 사극은 왜 그리 황당한지? 더하여 말해주고 싶은 것이 있다. 그토록 숭상해 마지않는 우리의 영웅 이순신이 우리나라 화폐에서 슬그머니 사라져 버린 일에 대해서는 왜 아무 관심이 없는지?

고 정주영 회장은 거북선이 그려진 지폐를 보여주고 배를 만들 차관을 간신히 얻어와 조선입국의 꿈을 이루었다고 한다. 헌데 그 지폐는 언제 어디로 사라졌는가? 지금의 백 원짜리 동전에 나와 있는 인물이 누군지 누가 알겠는가? 이순신? 세종대왕? 아니면 어느 정승? 대한민국에 무혼(武魂)이 사라진 이유를 이제 알겠는가?

아직도 달러가 모자라서, 아니면 학벌이 모자라서 선진국민이 못된다고 생각하는가? 어째서 대한민국 지폐에는 하나같이 선비들만 그려지는지, 그들이 나라를 세우고 지키고 부강하게 만들었나? 무인들은 왜 사라져야 하는지, 조선이 왜 망할 수밖에 없었는지, 나라가 위기일수록 단합은커녕 왜 쪼개지기만 하는지, 이 땅의 젊은이들은 왜 수험공부만 해야 하는지, 국회의원들은 왜 국민들 열받을 헛소리만 골라 해대는지 알겠는가? 무(武)없는 문(文)은 그렇게 타락하는 것이다. [신성대 동문선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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